조선 천재 화가의 삶, 신윤복, 최북, 김홍도

혜원 신윤복

혜원 신윤복 그림에는 다수의 여인이 등장한다. 외모가 출중한 기생, 빨래터의 아낙네, 여인이 주인공인 고운 자태와 신비한 미소가 매력적인 ‘미인도’도 있다.

안타깝게도 신윤복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조선 후기의 살림살이와 의복, 머리 모양 등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동시대 풍속화에서 배경에 불과하던 기녀와 여성을 전면에 등장 시키며 자신만의 시선으로 시대를 읽고 그려온 그림쟁이의 삶은 어쨌든 평범하지 않았을 터다.

화가 최북

자기 눈을 찌른 한국의 반 고흐, 최북 예술가의 기행은 동서양 구분이 없었다. 서양 미술사에 예술적 동지였던 고갱과 논쟁을 벌이다 스스로 귀를 자른 고흐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조선 영조 때 활동한 화가 최북이 있다. 어느 세도가가 자신의 그림 솜씨를 트집 잡자 “세상이 나를 깔보고 함부로 대하는구나”라고 화를 내며 스스로 한쪽 눈을 찔러버린 인물. 최북은 자신의 호 ‘호생관(毫生館)’의 뜻처럼 붓 한 자루에 의지해먹고산 조선 최초의 직업 화가다.

심한 술버릇과 괴팍한 성정은 소문이 자자했지만, 요즘 말로 최북은 그림에 진심인 천생 예술가였다. 어딜 가든 많은 사람이 그림을 청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먹고살기 힘든 형편임에도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이에게는 푼돈에 그림을 넘기고, 콧대 높은 벼슬아치에게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대도 그림을 절대 팔지 않았다. 문인 신광하는 시 ‘최북가’에서 최북의 성품을 “천한 신분 참으로 슬픈데 그의 사람됨은 몹시 정갈하고 매서웠네”라고 표현한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대부분 산수화다.

최북은 “조선 사람은 마땅히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며 중국 산천을 담은 그림을 최고로 여기는 당시 화풍을 비판했고, 조선 팔도를 누비며 ‘한강조어도’, ‘추경 ‘산수도’, ‘누각산수화’ 등의 작품을 남겼다. 손가락에 먹물을 묻혀 작업하는 ‘지두화’ 같은 독창적인 기법을 활용한 대담하고 파격적인 화풍이 눈에 띈다. 예술가의 말역시 영화처럼 처연하다. 열흘을 굶다 겨우 그림 한점을 팔아 번 돈으로 술을 마신 밤, 눈 쌓인 성벽 아래에서 자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천재화가 김홍도

단원 김홍도의 그림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시골 장터에서 씨름하는 두 사내를 중심으로 인물의 다양한 자세와 생생한 표정이 살아 있는 ‘씨름’이나 장난기 어린 표정의 아이들과 무서운 훈장님이 등장하는 ‘서당’을 보면 알 수있듯 절묘한 구성과 소재의 해학미가 돋보인다.

유명세에 비해 정확한 출생지, 가문, 사망 연도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지만, 어린 시절 지금의 안산에서 당대의 문인화가였던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다(참고로
안산 단원구는 김홍도의 호에서 따온 지명). 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른 나이에 도화서 화원이 됐다. 뛰어난 실력 덕분에 평생 어진을 2번 그렸는데, 젊은 영조와 훗날 정조의 초상이다.

1788년 9월 정조의 명으로 김응환과 함께 관동 지방과 금강산을 그리기 위해 떠났는데, 다녀와 남긴 작품이 ‘금강사군첩’이다. 그림을 분석해보니 당시 경치를 그린 곳은 무려 75곳이 넘었다고. 이 외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푼 것을 기록한 ‘수원능행도병풍’ 같은 기록 풍속화는 물론 30대에 가장 많이 그린 신선도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김홍도는 풍속화로 널리 알려졌지만 신선도, 인물화 등 여러 분야에두루 뛰어난 천재 화가였다. 조희룡은 <호산외사>에서 “김홍도는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씀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은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한다”고 표현하며, 스승 강세황 역시 <단원기>에서 “단원의 인품을 보면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은 모두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아님을 알 수 있다”고 기록했다. 세상을 보는 따듯한 시선 덕분에 서민의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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